나의 선교행전
나는 1924년 12월 29일 중국대륙과 한반도의 접경지대로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에서 태어났다.
나는 1905년 우리나라를 빼앗은 군국주의 일본제국에 맞서 1910년 19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1914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군사장비를 러시아 연해주 우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에 선적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끼에 압송되어 일본 제국주의 재판소에서 사형구형과 무기징역 언도를 받았던 독립운동가의 맏아들이다. 나의 아버지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한국교회 초기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도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이러한 부모님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100일만에 서국태(徐國泰, Donald A. Swicord)라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였다.
나의 부르심
나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르심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내가 집사로 봉사하던 의주군 고관면 토교동에 있는 토고교회에서 최한기 전도사를 강사로 초청한 해방 후 첫 부흥회를 통하여서 왔다. 최한기 전도사는 1938년 우리 민족교회에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해방되던 해에 7년 만에 출옥한 ‘출옥성도’ 중 한 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부흥회를 준비하면서 이 부흥회를 통하여 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러한 서원기도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강하게 거역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흥회 셋째 날 밤 성령께서 나를 거꾸러뜨리셨다. 강사 최한기 전도사의 설교가 시작되는 순간, 나는 성령의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그 자리에 거꾸러졌으며 어린 시절부터 지은 부끄러운 죄가 나의 눈앞에 활동사진처럼 나타나는 순간 땅바닥을 치며 통곡하고 회개하며 기도했다. 나의 통곡하고 애통하는 기도는 삼일 삼야 부흥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곁에 서시고 부흥강사 최한기 전도사와 담임목사 김태주 목사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나는 나의 생애를 바쳐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것을 서약하고, 토고교회가 속해있던 의산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를 받고 목사후보생이 되었다.
나는 신학 우등생이었으나 전도에는 낙제생이었다.
나는 1946년 2월 소련군과 공산당을 피하여 고향인 평안도를 떠나 서울로 피난하였다. 나는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부산의 고려신학교로 옮기고, 또 다시 서울에 새로 설립된 장로회신학교로 옮기는 등 세 학교를 통하여 신학교육을 받으면서 1949년 6월에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나는 전라남도의 무교회 면을 찾아 개척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학 우등생이었던 나는 전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 결국 나는 신학 우등생이었지만 전도에는 낙제생이 되었다. 나는 개척전도사 생활에 실패하면서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 시작하다
나는 1956년 8월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로드아일랜드 주의 프로비던스에 있는 바링톤대학(Barrington College)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간 곳은 펜실베니아 주 포트워싱톤에 있는 WEC 선교부의 선교사훈련원이었다. 나는 또 다시 미네소타 주 미네아폴리스 외곽에 있는 베다니선교대학에 들어갔다. 내가 선교사 훈련과 선교연구의 방향을 잡은 곳은 이 베다니선교대학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켄터키 주의 아주 작은 도시 윌모어에 있는 애즈베리신학교 대학원에서 전도와 선교학을 연구했다.
나는 Robert E. Coleman 교수 밑에서 전도학을, J. T. Seamand 교수 밑에서 선교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Maibise 교수 밑에서 교회행정학을 연구하고, 선교학 전공 신학석사(Th. M. in Mission) 학위를 마쳤다.
나의 선교학 연구는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 있는 윌리암케리대학교로 이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랄프 D. 윈터 박사와 데일 W. 키츠맨 박사 밑에서 세계선교역사와 선교전략을 연구하고 국제개발학 철학박사(Ph. D. in International Devemopment) 학위를 수여받았다.
나는 1960년부터 1978년까지 서울의 후암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그 교회를 한국의 세계선교를 위한 교회의 중심 교회로 발전시켰다. 1961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정규 필수과목으로 설치케 하고 이어서 감리교신학교와 성결교회의 서울신학교에서까지 전도학과 선교학을 강의함으로써 한국의 신학교에서의 선교학 교육의 창도자가 되었다.
나는 이어서 1963년 서울에 <국제선교연구원: International School of Mission>을 설립하였다. 이 연구원은 1973년부터 <동서선교연구개발원: East-West Center for Missions Research & Development>으로 확대 개편되어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이 되게 하였다.
나는 서구 선교단체들과의 동반자관계 형성에 노력하였다
나는 새롭게 일어나는 아시아 선교단체들의 지도력 개발을 위하여 서구 선교단체들과의 동반자관계 형성을 위한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한 나의 첫 번째 시도는 1968년 11월 5일부터 13일까지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전도회의>에서였다.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OMF 국제본부를 방문하여 국제본부 대표인 데니스 레인을 비롯한 간부들을 만나 한국 선교단체들의 선교사 훈련에 협력하여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제안은 잠깐 동안의 아주 짧은 대화 끝에 냉담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서구 선교단체들을 접촉하여 새로 일어나는 아시아 선교단체들과 협력할 것을 애원하였다.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먼저 뉴욕에 있는 C&MA 선교본부를 찾아가 총무 루이스 킹을 만나 아시아에서 C&MA 중심 선교국인 베트남에 새로 들어가기 시작한 한국 선교사들과 C&MA 선교회와의 협력선교를 제안하였다. 루이스 킹 총무와 간부들은 나를 정중하게 영접하고 대화하기는 하였지만, 한 달 후에 돌아온 회답은 “우리는 아직 아시아 선교단체들과 동반자 관계의 협력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델라웨어 주의 윌밍톤에 있는 <세계장로회선교회> 본부를 찾아가 선교 동반자 관계를 제안하였지만, 역시 그들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나는 일리노이 주 휫튼으로 가서 TEAM선교회 본부를 찾았다. 나는 TEAM선교회가 1953년 한국에서 문서선교와 방송선교를 시작하려 하였을 때 그들의 <생명의 말씀사> 개설을 위한 한국 정부 의 문화공보부 등록과 HLKX 방송국 개설의 정부 허가를 위하여 큰 도움을 주었었다. 그러한 관계로 TEAM선교회만은 나의 동반자 관계 제안을 수용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한 해가 넘는 오랜 기간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시아 선교단체간의 네트워크를 통한 동서선교협력 노력의 성공
결국 나는 범아시아 선교단체간의 네트워크를 먼저 형성하고 나서 서구 선교단체들과의 접촉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 아시아 12개국을 찾아가서 나라마다의 선교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한 특별 순방여행을 시작하였다.
나는 먼저 일본으로 가서 핫도리 아끼라 박사를 만났다. 그리고 홍콩으로 가서 조세광 박사와 등근휘 박사를, 대만에서 데이비드 랴오 박사를, 태국에서 윗첸 와따끼 차로엔 목사를, 싱가포르에서 찬두레이 감독을, 말레이지아에서 G. D. 제임스 박사를, 필리핀에서 그레그 팅슨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나서 베트남으로 가서 돈반미엔 목사를, 인도에 가서 데오도르 윌리암스 목사를, 파키스탄에서 바지르 지완 감독을, 방글라데시에서 사부하스 생마 목사를 만났다. 이 모든 사람들은 1960년대 아시아에서 선교운동의 중요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아시아 선교단체들의 네트워크 조성에 동참할 것과 상호간의 동반자 선교관계를 맺는데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우리는 마침내 1973년 8월에 한국 서울에서 <범아시아선교지도자컨설테이션>을 소집하자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나는 이 합의를 가지고 1971년 9월 미국 UFMA와 EFMA가 함께 그린레이크에서 개최한 하기선교대회에 참석하여 1973년 8월 한국 서울에서 <범아시아선교지도자컨설테이션>을 개최한다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이 모임에 서구 선교단체 지도자들을 특별 객원참가자로 초청한다는 공개초청을 발표하였다. 다음과 같은 선교학 교수들과 IFMA, EFMA, 그리고 WEF 간부들 여덟 사람이 이 공개초청에 호응하였다.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아더 글라서 박사, 랄프 D. 윈터 박사, 피터 와그너 박사;
달라스신학교 선교학 교수 조지 피터스 박사;
IFMA 총무 에드윈 L. 잭 프리젠 박사;
EFMA 총무 글라이드 W. 테일러 박사;
WEF 국제총무 왈드렌 스캇 박사;
WEC 미국본부의 아시아 총무 호레이스 S. 윌리암슨 목사.
나는 이 여덟 서구 선교학자와 지도자들을 <범아시아선교지도자컨설테이션>에 특별 객원참가자로 정식 초청하였다. 서구 선교지도자 고위층에 대한 이 초청으로 말미암아 아시아 선교지도력 개발을 위한 나의 동서(East-West)간의 협력을 위한 나의 노력이 크게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73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한국 서울에서 개최한 <범아시아선교지도자컨설테이션>의 소집하고 그 회의를 주도하였다. 아시아 13개국으로부터 26명의 선교지도자들과 특별히 초청된 네 사람의 서구 선교학자들과 IFMA, EFMA, WEF의 세 총무단, 그리고 WEC선교회와 위클리프성경번역선교회의 간부가 참석하였고, 한국에서 사역하는 12명도 옵저버로 참석하였다.컨설테이션은 <계속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과업을 추진하도록 위촉하였다.
- 1974년 말까지 최소 200명의 새로운 아시아 선교사를 더 파송하도록 격려할 것.
- 아시아의 모든 나라마다 ‘선교단체협의회’를 조직하도록 격려할 것.
- 한국에 <동서선교연구개발원> 설립을 추진할 것.
계속위원회는 인도네이사 칼리만탄 섬과 태국 동북지역을 200명 선교사를 집중 파송할 대상지역으로 선정하고, 1970년대 말까지 200명의 새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을 포함하여 부과된 모든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다. 1974년 말까지 일본, 한국, 홍콩, 인도, 그리고 인도네시아 각 나라마다 ‘선교단체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은 1973년 컨설테이션 직후 제1회 하기선교대학원을 컨설테이션에 참석했던 네 사람의 선교학자들을 강사로 개강함으로 시작되었다. 하기선교대학원에는 홍콩,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말레이지아 등 5개국의 선교사 후보생들과 한국 선교사들을 합하여 67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였다.
나는 계속위원회의 총무로 <아시아선교협의회: AMA> 창립총회 소집을 주도하여 1975년 8월 28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의 아카데미하우스에서 개최하였다. 이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총회에는 방글라데시, 자유중국,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지아, 파키스탄,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아시아 13개국 대표들과, 화란, 영국, 독일, 미국 등 서구 4개국 대표들이 협동대표로 참석하였다.
AMA 창립총회는 총회 마지막 날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을 일만여 명의 신도들 앞에서 선포하였다. 이 <서울선언>은 1966년 미국 교회의 <휫튼선언>과 1970년 독일 신학자들의 <프랑크푸르트선언>과 짝을 이룬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인들의 ‘선교선언’이었다. 범아시아 선교네트워크로서의 AMA는 1975년 이래 신속하게 그리고 아주 폭넓게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 영향을 끼쳤다.
197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제2회 AMA대회에 초청받은 아프리카 나이제리아복음선교회 총무 판야 바바 목사는 그 다음 해에 즉시 <나이제리아복음주의선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1982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3회 AMA대회에 초청받았던 브라질 안디옥선교회 회장 조나단 산토스 목사는 귀국 즉시 <브라질외국선교단체협의회> 창립을 서둘러 1983년에 창립총회를 소집하였다. 1986년 제4회 AMA대회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서 개최하면서,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대표 수십 명을 초청하고 <제삼세계선언>을 발표하고, 1989년 5월 미국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제삼세계선교협의회>를 창립하였다. 이 조직은 AMA가 주도하여 이루어낸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세 대륙간의 ‘세계선교 네트워크’이다.
이와 같은 나의 세계선교 네트워크에 대한 대모험에 많은 서구 선교지도자들이 크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빌리 그래함으로부터 미국 조지아 주 아틀란타에서 모이는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할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 로잔대회 준비위원회 세 번째 날 의장으로 선출되는 영광을 누리게까지 되었다.
1974년 나는 세계복음화로잔대회의 전체회의에서 선교전략에 대한 강사로 지명되었다. 나는 이 대회에서 “새로운 세계를 위한 선교구조의 갱신”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이 강연에서 나는 “서구세계의 선교만으로의 일방적 선교로부터 동과 서가 함께하는 쌍방선교로 돌아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나는 또한 “세계의 동과 서에는 쌍방이 모두 선교자원과 선교의 필요가 함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선교인력의 생성과 투입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동과 서가 함께 손을 잡고 선교의 가용자원과 선교가 필요한 지역을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 길만이 동과 서, 세계의 양쪽으로부터의 ‘선교의 새 세력’의 생산과 훈련의 창출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나의 선교학 교수사역
1974년에 스위스 샤도데이에서 모인 <세계복음주의협의회: WEF> 총회는 새로운 <국제선교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한 <3인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나를 제삼세계를 대표하는 위원으로 선정하여 임명하였다. 나는 1975년 8월 <WEF 선교위원회> 창립회의를 서울에서 모일 수 있도록 주도하였다.
1979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파사데나에 있는 윌리암케리국제대학교의 교수로, 오레곤 주 포트랜드의 웨스턴신학교 교수로, 또한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 방문교수로 봉사하였다.
나는 1988년 5월 <제삼세계선교지도자컨설테이션>을 미국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 소집했다. 그 결과로 다음 해인 1989년 5월 <제삼세계선교협의회: TWMA>가 창립되었다. 나는 창립회장으로 선출되어 1995년까지 회장으로 제삼세계 선교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나는 1988년부터 매 4년마다 미국 일리노이 주 휫튼대학에서 개최되는 <한인세계선교대회> 주제장사로 계속 초청되었다.
나는 휫튼대학 대학원, 무디선경학교, 트리니티신학교 선교대학원, 웨스터민스터신학교, 달라스신학교, 리폼드신학교 등 미국에 있는 여러 신학교와 선교대학원의 초빙강사로 활동했다.
민족통일을 위한 선교활동
1989년부터 2000년까지, 나는 24회에 걸쳐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선교, 그리고 북한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사역의 길이 열리도록 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나는 조선인민공화국 김일성은 세 번이나 그의 주석궁에 초청되어 미국과의 화해의 길을 위한 대화를 하였다. 그 결과로 나는 1991년 6월 북한의 전 UN대사 한시해 등 일행을 미국으로 초청하여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나게 하고,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전달하게 하였으며, 빌리 그래함을 접촉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1993년, 빌리 그래함과 지미 카터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게 되었다.
김일성 주석은 김일성종합대학교에 종교학과를 신설하고 나를 방문교수로 임명하였다. 나는 기독교신학, 성경주석, 기독교역사 등 각종 기독교 서적 2,570권을 김일성종합대학교 도서관에 정식으로 기증하고 120명 대학교수들 앞에서 도서기증식 기념강연으로 ‘민족과 교회’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나는 평양봉수교회와 칠골교회에서 한 해에 두 번씩 설교했으며, 평양신학원 방문교수로 봄과 가을에 강의를 했다.
2000년 이후의 활동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나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러시아기독교지도력연구원>을 설치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러시아 목회자들을 3년 동안 교육하였다. 이 연구원 출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러시아기독교 모스크바대회(Synod)>를 조직하여 정부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2003년 9월 제8회 AMA대회를 모스크바에 초청하여 구 소련연방에 속하였던 CIS 15개국의 교회지도자 100여 명이 참석하게 하였다. 또한 이 대회에서 <아시아선교학회: ASM>가 조직되었고 풀러선교대학원 박기호 교수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006년 11월 제9회 AMA대회를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개최하였다.
2004년 6명의 <동어선교연구개발원> 출신 젊은 신학자들이 서울에 모여 <조동진선교학연구소> 설립을 결의하고 <세계선교역사박물관> 건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1973년 설립되어 1999년 활동이 중단된 <동어선교연구개발원>을 다시 개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박기호 박사를 제2대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2004년 이후에 전개된 이 모든 시도는 아시아의 선교운동이 초기 기독교 국가들과 전통적 서구 선교의 시대를 넘어 성경적 선교원리를 계승하고, 사도적 선교방법으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나의 후학들의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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