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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MR. MISS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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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Vigorous Advocate of Non-Western Missionary Movemen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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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교사를 보내는 교회와 선교회가 있는 것처럼 선교사를 받는 교회와 받는 선교단체가 있어야 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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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May 2012 01:13:36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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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사도 바울은 선교지로 갔을 때 먼저 찾은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기도하는 경건한 백성들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의 선교는 항상 흩어져 사는 무리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먼저 만났다. 프로테스탄트 선교 200년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란 식민지 회사가 인도네시아 섬들에 먼저 와서 자국민 백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화란 선교사들은 먼저 와있는 식민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사도 바울은 선교지로 갔을 때 먼저 찾은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있는 기도하는 경건한 백성들의 모임이었다. 초대교회의 선교는 항상 흩어져 사는 무리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먼저 만났다.<br />
프로테스탄트 선교 200년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란 식민지 회사가 인도네시아 섬들에 먼저 와서 자국민 백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화란 선교사들은 먼저 와있는 식민지 회사의 백인 교회 교역자들의 도움을 받았다.<br />
영국의 식민지 회사가 인도에 와서 백인들의 교회를 세웠고 뒤이어서 보냄 받은 영국 선교사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본토인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는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p>
<p>지금은 온 세계 어느 나라에든지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없는 곳이 없다. 따라서 뒤를 이어 시작한 한국을 위시한 후진 선교국의 선교사들은 전혀 교회를 모르는 복음의 불모지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보낸 선교사들이 이미 있는 교회들과 선교단체들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고립된 선교를 일삼는다면 그것은 성경의 원리로나 역사적 선교의 원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 현대 선교는 바울이 마케도니아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초청의 환상에 따른 것처럼 선교 대상국의 교회와 선교단체의 초청에 따라야만 한다.</p>
<p>선교는 보내는 교회(sending churches)와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교회(receiving churches) 그리고 보내는 선교단체(sending agencies)와 선교사를 받는 선교단체(receiving agencies)가 서로 함께하는 사역인 것이다. 이러한 보내고 받는 상관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내거나 초청하는 기관 없이 무작정 가는 일은 삼가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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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교사의 지적 향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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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2 May 2012 02:02:10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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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선교사의 지성은 세계와 선교 현장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 탐구의 삶을 통하여 개발되고 향상한다. 선교사는 자기 스스로 지적 향상을 위한 독립적 지식 탐구의 삶을 형성해야만 한다. 21세기 선교사들의 지식 탐구는 선교의 현장으로서의 세계 탐험보다는 서구의 선교이론 습득을 지향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슬람 선교에 관한 연구를 아랍 현지가 아닌 미국의 선교학자를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이슬람 문화의 근본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선교사의 지성은 세계와 선교 현장에 대한 끊임없는 지식 탐구의 삶을 통하여 개발되고 향상한다. 선교사는 자기 스스로 지적 향상을 위한 독립적 지식 탐구의 삶을 형성해야만 한다.<br />
21세기 선교사들의 지식 탐구는 선교의 현장으로서의 세계 탐험보다는 서구의 선교이론 습득을 지향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슬람 선교에 관한 연구를 아랍 현지가 아닌 미국의 선교학자를 통하여 얻으려는 것은 이슬람 문화의 근본 자원(original source)이 아닌 이차적인 자원(secondary source)에서 배우려는 것과 같다. 불교 문화권이나 힌두 문화권,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선교하던 서구 선교사들의 연구 업적이 아무리 넓고 깊다고 해도 그것은 그 문화권 현장의 근원에서 탐험하는 것에 견줄 수 없다.<br />
윌리암 케리처럼, 존 로스처럼 선교 현장의 생생한 역사적 자원을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문화권의 학자들로부터 직접 배워야만 한다. 그것만이 살아있는 지식이 된다. 원천(源泉)에서 옮겨지고 다듬어지고 꾸며진 제 2차적 자료를 통한 연구는 편견을 낳고 결국 왜곡을 낳고 만다.<br />
나는 오늘날 선교사들이 윌리암 케리나 존 로스처럼 선교 현지의 대학교와 연구기관에서 연구하고 탐구함으로써만 보다 깊고 성숙한 선교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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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리가 계승해야 할 사도적 선교의 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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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8 May 2012 01:41:09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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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바울의 선교에의 부르심으로부터 그가 주후 63년 네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30년간의 선교 사역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사도적 선교의 원리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 (행 9: )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갈 1:17-24) 바울을 성령을 통하여 교회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행 13:2-3) 바울은 항상 둘씩 짝지어서 활동했다. (행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바울의 선교에의 부르심으로부터 그가 주후 63년 네로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 30년간의 선교 사역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사도적 선교의 원리이다</p>
<ul>
<li>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 (행 9: )</li>
<li>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후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갈 1:17-24)</li>
<li>바울을 성령을 통하여 교회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행 13:2-3)</li>
<li>바울은 항상 둘씩 짝지어서 활동했다. (행 13:4; 15:40)</li>
<li>바울은 한 지역에 정착하여 한 곳을 위한 선교로 일생을 마치지 않았다. 한 지역에서 정착하여 대를 이어 사역하는 선교는 서구 식민지 시대 선교의 유물이다.</li>
<li>바울은 이동하는 선교(tinerant Mission)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그는 한 지역에 3년 이상 머문 일이 없었다.</li>
<li>바울은 항상 사람을 발견하고 훈련시켜 세우고 자기가 하던 일을 계승시키고 또 다른 곳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li>
<li>바울은 커뮤니케이션 선교의 원리를 보여주었다. 신약성경은 베드로서와 야고보서와 유다서와 요한서신을 제외하면 사도행전 이후 13개의 서신이 모두 바울의 선교통신들이다.</li>
<li>바울은 개인 전도와 교육과 훈련과 파송과 교회설립과 목회자의 지도력 개발의 선교 체계를 세워놓았다.</li>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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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명충돌론의 허구와 위험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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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May 2012 02:28:56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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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서구 문명권과 비서구 문명권간의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이삼성의 헌팅턴 비판의 결론과 같이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20세기 말기 세계적 패권 국가가 된 것은 문명 충돌의 결과가 아니라 영국과 독일이라는 동일 기독교 문명권에 속하는 두 나라의 폭력적 패권 전쟁에 영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비인도적 범죄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모두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서구 문명권과 비서구 문명권간의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이삼성의 헌팅턴 비판의 결론과 같이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20세기 말기 세계적 패권 국가가 된 것은 문명 충돌의 결과가 아니라 영국과 독일이라는 동일 기독교 문명권에 속하는 두 나라의 폭력적 패권 전쟁에 영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그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br />
20세기에 일어난 비인도적 범죄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모두 기독교 문명을 공유했던 유럽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던 것에 대해 헌팅턴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 문명충돌을 통한 21세기의 세계 질서 재편 논리는 허구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br />
1990년대에 벌어진 동유럽과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의 동티모르의 인종과 종교 분쟁,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의 미국 대사관에 대한 자폭 테러, 그리고 비행기 공중 납치를 통한 자폭 테러로 미국 본토 세계 패권의 중심 뉴욕과 워싱턴을 공격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그럴듯한 설명의 틀을 제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1세기의 패권 전쟁이 이데올로기나 경제적 또는 군사적 전략의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닌 인종과 종교 같은 문명적 요인들로 파악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미국 국익의 극대화를 위한 세계 패권 전략 수립의 두뇌로 활약해야 하는 백악관 주변 정치학자들의 조작된 정치 이론 이상일 뿐 그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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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민족과 종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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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5 May 2012 02:25:50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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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종교는 근원적으로 민족으로부터 발생했다. 국가와 종교, 국가와 민족은 항상 상호 제약하고 상호 공존한다. 그래서 많은 기능적 세계 질서가 발전한다고 해도 민족과 종교의 문제는 더욱 더 강한 유대를 가진 공동체로 발전한다. 한편으로는 초민족주의(Trans-Nationalism)를 말하기도 하지만 민족주의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창조된 오늘에도 시들지 않는 세력이다. 세계 도처에서 민족주의는 약해지기는커녕 강해지고 있다. 미래의 민족주의는 편협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이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종교는 근원적으로 민족으로부터 발생했다. 국가와 종교, 국가와 민족은 항상 상호 제약하고 상호 공존한다. 그래서 많은 기능적 세계 질서가 발전한다고 해도 민족과 종교의 문제는 더욱 더 강한 유대를 가진 공동체로 발전한다.<br />
한편으로는 초민족주의(Trans-Nationalism)를 말하기도 하지만 민족주의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창조된 오늘에도 시들지 않는 세력이다. 세계 도처에서 민족주의는 약해지기는커녕 강해지고 있다. 미래의 민족주의는 편협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이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는 자기 보존이며,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존재이다. 세계의 질서가 아무리 발전해도 종교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고 인간 생명과 직결된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의 미래는 과거의 역사가 그랬듯이 민족과 종교의 역사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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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도급 선교사의 위치와 역할의 다양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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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30 Apr 2012 00:08:56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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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선교는 세계를 향한 천국 확장을 위한 사역이다. 따라서 선교사역은 처음에는 한 나라와 한 지역의 작은 모퉁이에서 시작하지만, 그 사역의 영역과 지역은 확대되고 한 나라와 한 대륙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세계의 끝까지 이르게 되어야 한다. 선교사가 한 지역에 정착되어 전 생애를 바치던 19세기 식민지 선교시대의 패턴(pattern)은 이미 끝났다. 선교사는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이동하며 활동의 영역을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선교는 세계를 향한 천국 확장을 위한 사역이다. 따라서 선교사역은 처음에는 한 나라와 한 지역의 작은 모퉁이에서 시작하지만, 그 사역의 영역과 지역은 확대되고 한 나라와 한 대륙의 한계를 뛰어넘어 온 세계의 끝까지 이르게 되어야 한다.<br />
선교사가 한 지역에 정착되어 전 생애를 바치던 19세기 식민지 선교시대의 패턴(pattern)은 이미 끝났다. 선교사는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이동하며 활동의 영역을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주의 나라를 땅 끝까지 확장하는 역할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 선교의 원리이다.<br />
수습선교사에서 → 초급선교사로 →초급선교사에서 선임선교사로, 이렇게 선교사로서의 완숙 단계에 이르는 동안 한 선교사의 사역은 끝없이 역할과 영역과 지역이 넓어지고 동역하는 선교사 상호간의 관계가 다양해져 나가게 된다.<br />
이제 이 단계를 넘어선 성숙한 선교사에게는 선교의 ‘종합계획’과 ‘정책수립’과 ‘전략개발’에 참여하는 <지도급 선교사>로서 <선교회의 간부: mission executives>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br />
한국에서는 선교회 조직과 선교사의 <연조: 年組>에 따른 지위와 차지해야 할 위치가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지 못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종신직 선교사들의 10년, 20년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활동할 지도적 위치가 분명치 않고, 선교사가 아닌 목회자 중심의 선교회 이사회 조직과 본부 구조가 가져오는 선교운동의 정체와 지도력의 결핍 상태를 가져오고 있는 한국 선교회들의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p>
<p><strong>선임선교사로서의 안식년의 의미</strong><br />
초급선교사로서의 안식년과 선임선교사로서 가지게 되는 안식년의 의미는 크게 다르다. 선임선교사의 경험은 선교사로서 앞으로의 자신의 지도력 개발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된다.<br />
그것은 ①첫째로 자기 역량과 개성적 특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고, 앞으로 집중적으로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데 있다. ②둘째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할 필요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br />
두 번째 안식년은 선교사로서의 후반기에 대한 자기 설계의 기회이기도 하고 자신의 지도력 개발의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안식년을 어떻게 유용하게 설계하느냐는 앞으로의 선교사로서 종신하는 미래 설계의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p><strong>간부급 선교사의 기능별 선교지도력</strong><br />
지도자급 전문직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능별 카테고리: catagory로 나눌 수 있다.<br />
(1) 선교본부의 인사관리, 재정운영과 일반 업무관리 같은 선교 행정을 담당하는 <간부선교사: mission executives><br />
(2) 선교사후보생의 선발과 훈련을 담당하는 <선교사 훈련지도자: missionary trainer><br />
(3) 선교정책과 선교전략을 연구 개발하는 <선교전략전문가: mission strategies specialist><br />
(4) 선교신학과 커뮤니케이션, 문화인류학 등 선교이론을 전공한 <선교학자: missiologist><br />
(5) 국제적 선교기구와 조직을 통하여 세계적 선교사조를 이끌어가는 <국제선교 지도자: international missionary statesman><br />
(6) 세계선교정보를 연구하는 <선교정보연구 전문가: missionary information research specialist><br />
(7) 선교도서의 출판과 라디오, TV, 필름 등 대중매체를 운영하는 <선교커뮤니케이션 전문가: mission mass-media specialist></p>
<p>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는 지도자급 선교사는 선임선교사로서의 사역을 하는 동안에 각자의 재능과 특성에 따라 스스로 앞으로의 선교지도자로서의 길을 선택하여 경험을 쌓고 연구를 계속함으로써 스스로 그 길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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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도력 훈련</title>
		<link>http://davidcho.or.kr/archives/220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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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3 Apr 2012 04:43:37 +0000</pubDate>
		<dc:creator>admin</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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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지도력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습득될 수 있고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고도 자질을 갖추어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어떤 자질들은 습득되어질 수 있고 잠재적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있어서는 개발도 가능하다. 종교적 지도자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장 중요한 환경적인 요소이다)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천재라도 일반적인 지도력과 재능을 혼돈하게 해서는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지도력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습득될 수 있고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특별히 하지 않고도 자질을 갖추어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어떤 자질들은 습득되어질 수 있고 잠재적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있어서는 개발도 가능하다.<br />
종교적 지도자에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장 중요한 환경적인 요소이다)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천재라도 일반적인 지도력과 재능을 혼돈하게 해서는 안 된다.<br />
예수의 비유에서 보면 한 달라트를 받았던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았다. 더 많이 양도 받은 이들은 그들의 능력을 자각하고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어떤 자질들은 유전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사람에게 상속되어 지도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학습과 체험을 통하여 얻어지는 자질들도 있다.<br />
엘리야와 엘리사 시절에 길갈, 베델과 다른 읍들에 학교가 있었다. 부름을 받은 학생들이 이들 학교에 모여들어 그들이 부름 받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하여서 훈련을 받았었다. 그 결과로 솔로몬 때부터 유다 왕국 말엽까지 공식적으로 예언할 수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예언적인 학교에서 개발되고 훈련되고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영적인 은사들도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br />
예수도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시간을 그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그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어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br />
신약 성서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세 차례나 그 제자들에게 특수한 가르침과 훈련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앙적 지도자의 지도력을 훈련하는 것은 성서적인 사명이다.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예수와 열 두 제자, 바울과 디모데 등등은 성서에 나타난 대표적인 예이다.<br />
훈련시키면 사람들이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지도자를 훈련하는 것을 싫어할 수도 있다. 얼마 안 가서 그들은 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져서 비판적인 세력이 될 수도 있다. 초월적인 지도자라면 그와 같은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br />
모세는 기꺼이 자진하여 여호수아를 훈련시켰다. 여호수아는 이집트의 벽돌 공장에서 노예로 자란 사람이었다. 광야를 통하여 해방을 받게 되었고 아말렉과 싸울 때에는 모세 곁에 있게 되었다. 그는 항상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동행하는 사람이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오를 때에는 산까지 동행한 사람이었다.<br />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탐한 열 두 지파 수령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서 조실있게 훈련시켰으나 독재적인 모양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br />
이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자기 조상들에게로 가야 될 것을 알고 그는 모든 이기적인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하나님께 회중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이스라엘 백성 위에 세워서 그들을 인도하도록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다.<br />
하나님은 모세가 택한 선택을 승인하셔서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로 위임되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40년 동안이나 함께 일하여 왔으며 모세는 기꺼이 지도자의 책임을 여호수아와 더불어 나누어 갖기를 기뻐하고 수십 년에 걸쳐서 그를 훈련하였던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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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교에의 부르심의 성경적 원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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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Apr 2012 13:13:0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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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선교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고 그 역할에 따라 그 부르심의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떤 부르심에서나 동일하다. “저희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에 응답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 중에서 다시 부르심(calling within a calling)”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부르심을 받은 여러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선교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다.<br />
부르심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고 그 역할에 따라 그 부르심의 성격이 다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린 후에”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어떤 부르심에서나 동일하다.<br />
“저희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br />
<선교에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부름 받은 자 중에서 다시 부르심(calling within a calling)”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br />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부르심을 받은 여러 일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몬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헤롯왕의 젖동생 미나엔과 사울”이었다.<br />
그 부르심을 받은 교회 사역자 중에서 또 다른 부르심이 왔다. “내가 불러 시키는 다른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는 부르심이다. “성령이 불러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입은 자”가 곧 선교사이다. 바나바와 사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 중에서 또다시 불러서 “성령이 시키시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입은 첫 선교사들이다.</p>
<p>선교학에서는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 (Set apart  for me &#8211; for the work to which I called them)”를 통산적인 ‘목회사역’과 ‘선교사역’의 차별성(distinction)으로 정의한다. 오늘 한국 교회의 목회자와 선교사에 대한 차별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 사도행전 13장 2절과 3절에 대한 의미를 바로 해석하지 못한 데 있다.<br />
나는 선교사를 훈련시키면서 선교사를 ‘모집’한다고 하지 않는다. 선교사는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부름 받은 자를 찾아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screening within screening, 곧 ‘추려낸 사람들 중에서 또다시 추려냄을 받은 사람’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br />
얼개미로 추려내고 중채로 추려내고 세채로 추려내는 정밀한 선정 작업이 선교사 선발에서 부름 받지 않은 무자격자의 선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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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sian Missions Advance 제35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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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7 Apr 2012 10:02:4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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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2 ATEA 포럼 기조강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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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1 Apr 2012 13:20:0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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